
2012년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는 실제 인권운동가 김근태 고문의 자전적 기록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고문과 인권 유린을 정면으로 다루며,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을 직시하게 만드는 강렬한 영화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고문이라는 극단적 국가폭력을 최소한의 연출로 담아낸 이 영화는, 단순한 과거 회고를 넘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분명합니다. “지금 다시 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고문이 일상이었던 국가폭력의 실상 (고문)
남영동 1985는 영화 전체의 90% 이상이 고문실 내부에서 벌어지는 심문과 폭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김종태’는 허위 자백을 강요받으며 육체적, 정신적 고문을 반복적으로 당하는데, 이 장면들은 극도로 절제된 연출 속에서도 관객에게 엄청난 압박감과 불편함을 안깁니다. 감정적 자극보다는 ‘사실 그 자체’의 전달을 우선시한 연출 방식은, 오히려 더 강한 현실감을 만들어냅니다. 단순한 공포 연출이 아니라, 당시 남영동에서 고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거의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특히 고문 기술자 ‘이두한’(이경영)의 캐릭터는 조직화된 국가폭력의 얼굴을 대변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 없이 임무처럼 고문을 수행하며,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범죄가 어떻게 일상화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냉정한 말투, 비인간적인 절차는 관객으로 하여금 고문을 ‘특수한 상황’이 아닌 체제의 일부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고문을 묘사할 때 외적인 피와 폭력보다도, 인물의 심리와 고통의 지속성을 조명합니다. 이는 김근태 본인의 회고록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며, 실제로 많은 장면에서 고문 피해자의 심리를 현실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작품은 고문이 단지 신체적 고통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과 정신을 파괴하는 시스템적 폭력임을 강조합니다.
체제에 복무한 인간들, 그리고 침묵 (국가폭력)
이 영화의 또 다른 강력한 메시지는 ‘누가 가해자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단지 고문 기술자만이 아니라, 이를 방조하고 명령한 수많은 사람들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남영동은 단지 한 장소가 아니라, 당대 권력 구조의 상징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이 시스템 속에는 검찰, 경찰, 정치권, 언론까지 다양한 집단이 연루되어 있으며, 이들은 직접적 폭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고문과 인권 침해를 가능하게 만든 구조적 방관자였습니다. 이두한은 단지 가해자 한 명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 전체를 상징합니다. 그는 상부의 지시를 따르고, 임무를 수행하며, 체제에 복무하는 공무원으로 기능할 뿐입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습관처럼 반복되는 폭력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기계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인물을 통해, 단순한 악인이 아닌 ‘시스템화된 폭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영화는 ‘침묵’의 공범성을 강하게 지적합니다. 감옥에 갇힌 김종태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사회는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는 현실에서도 수많은 인권 유린이 “모두가 알고도 모른 척했던” 시대 분위기 속에 벌어졌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체제는 공포를 통해 침묵을 강요했고, 그 침묵은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이러한 구조적 폭력과 방조를 직접적으로 지적하며, 관객에게 “당신은 그 시대에 무엇을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인권의 질문 (인권)
남영동 1985는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메시지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영화는 민주화 이전의 폭력과 억압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묻습니다. 고문이라는 극단적 방식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권력에 의한 억압이나 제도적 부당함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과거를 잊지 말자’고 말하는 이유는, 그 잊혀짐이 같은 오류를 반복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인권교육 자료로도 활용될 만큼, 고문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단순한 과거 비판을 넘어서, 시민의 권리와 국가 권력의 경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또한, 피해자인 김종태가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자백하지 않는 모습은 인권의 본질이 ‘사람답게 살 권리’임을 역설합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기억의 윤리’를 말하고자 했습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이 아니라, 그 기억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입니다. 남영동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고문실이 아니지만,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잊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남영동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인권은 단지 선언이 아니라, 끊임없는 감시와 실천이 필요한 영역임을 영화는 분명히 말합니다.
남영동 1985는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파괴했는지를 조용하고 강하게 전달합니다. 지금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우리는 단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의롭고 자유로운지를 되묻게 됩니다. 기억하는 자만이 다시 저지르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길 바랍니다.